그 시절 기쁨을 채워준 달빛천사
이용신 성우
|
|
누구에게나 추억의 만화가 하나쯤 있다. 2000년대 초, 성우 이용신은 메마른 가슴속을 적셔줄 멜로디로 수많은 어린이를 텔레비전 앞에 모이게 하는 마법을 걸었다. 15년이 지나 지금껏 그려왔던 작은 꿈을 간직해 온 이가 언제나 빛나는 둥근 달을 찾았고, 우리에게 추억으로 남았던 달은 다시 가득 차올랐다. 모두의 마음을 언록(unlock)시킨 그때 그 시절로 안내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근황을 알려주세요.
녹음도 하고 한국예술원 성우 과정 교수로 강의를 나가거나 유튜브 촬영을 하며 지내요. 일주일에 2번 영상을 업로드 하는데 촬영하고 편집 본을 검토하다 보면 일주일이 금방 가요. 쉬는 날에는 운동하거나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보내는 편이에요.
MBTI가 ENTP라고요. 가장 호기심이 많은 MBTI로 꼽히는데 성우님 스스로도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고 하셨어요.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건 무엇인가요?
지금은 ENTJ로 바뀌었어요. P랑 J가 반반이기도 했고, 대학생 때도 ENTJ가 나왔었거든요. 정말 사람은 안 변하는 것 같아요. (웃음) 요즘 가장 관심 많은 분야도 MBTI에요. 올해 1월부터 교회에서 중등부 선생님을 맡게 됐는데 아이들이 한창 사춘기라 그런지 리액션도 없고 조용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지 고민했죠. 다행히 MBTI에 흥미를 가지더라고요. 제대로 알려주고 대화하기 위해 관련 자격증을 준비 중이에요.
많은 사람이 성우는 목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외에 필요한 자격도 많을 것 같아요.
사실 목소리보다 더 중요한 건 연기력이에요. 가끔 “성우인데 연기를 잘하시네요”라고 얘기하시는 분이 있어요. 성우는 그냥 목소리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더라고요. 라디오가 활발하던 시절에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어요. 그때는 독특한 음색을 가진 분이 많았죠. 하지만 성우는 기본적으로 ‘목소리 연기자’예요. 1인 다역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떤 인물을 맡아도 소화할 수 있는 연기력은 기본이죠. 전달력도 중요해요. 드라마나 영화는 입 모양과 몸짓, 호흡, 상황을 눈으로 보니까 괜찮은데 애니메이션은 그렇지 않잖아요. 소리 하나로 모두 표현하는 능력이 필요하죠. 주 시청층도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우는 장면에서도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들려야 하고요. 자연스럽지만 잘 들리도록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게 중요해요. 또 연극영화과 출신도 많지만 저는 아무 관련 없는 전공을 했거든요. 부족한 연기를 채우려면 나만의 장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신인일 때 ‘NG 내지 않기’를 목표로 잡았죠. 그러려면 빠른 문맥 파악과 대본을 빨리 읽어 내려가는 능력이 필요했어요. 이런 점에서 순발력도 갖춰야겠네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성우님도 <짱구는 못말려> 작품에서만 채성아 선생님 외에 TV에 나오는 쇼호스트, 기상 캐스터 등 여러 연기를 하셨어요. 이렇게 다양한 배역을 맡을 때 말투를 다르게 잡는 노하우가 궁금해요.
내가 가진 데이터가 많아야 해요. 특히 애니메이션은 어투를 과장하는 경우가 많아요. 표정은 우스꽝스러운데 말투만 일반적이면 어색하잖아요. 그래서 <개그콘서트>나 <코미디빅리그> 같은 개그 프로를 많이 봤죠. 재밌거나 독특한 말투가 들리면 참고했고요. 요즘은 자연스러운 느낌을 선호해서 드라마나 영화까지 여러 작품을 보는 편이에요.
‘이용신’ 하면 <달빛천사>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큰 사랑을 받으신 만큼 부담감도 크셨을 것 같아요. 넘어야 할 큰 산이라고 얘기하시기도 했는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사실 아직도 극복이 안 된 것 같아요. (웃음) 많은 성우가 느끼는 딜레마이기도한데 대표 이미지가 생기니까 여러 배역을 맡기 어렵더라고요. 욕심 많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우는 다양한 역을 많이 할수록 행복하기 때문에 여러 역할을 하고 싶거든요. 물론 <달빛천사>는 저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작품이라 너무 좋고 고맙죠. 2019년에 다시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한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아픈 손가락 같은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편안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덕분인지 오랜 친구 같아요.
<달빛천사> ‘루나·풀문’, <캐릭캐릭 체인지> ‘아무’, <리그 오브 레전드> ‘아리’ 등 인생 캐릭터는 많이 언급해주셨어요. 반대로 더 빛을 보길 바라는 캐릭터가 있다면요?
<라이온 수호대>에서 ‘심바’ 아들인 ‘카이온’ 역이요. 용감한 친구를 모아 수호대를 만든 후 나쁜 동물들과 싸우거나 모험을 떠나는 작품인데요. 여자 아역에 치중했던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오디션을 준비했어요. 친구들과 악당을 물리치고 일을 해결하는 연기를 하니까 진짜 모험가가 된 것 같고 스스로도 성장한 느낌이 들어서 재밌게 녹음했어요.
성우라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좋은 점과 좋은 순간이 다른데요. 지루한 걸 잘 못 참는 성격이라 그런지 반복이 없다는 게 좋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고, 매회 감정이 바뀌거든요. 여러 사람으로 살 수 있어서 즐거워요. 좋았던 순간은 2019년 이화여대 축제에서 공연했을 때죠. 15년 만에 애니메이션 속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고 사실 처음에는 너무 부담됐어요. <달빛천사> OST는 추억 속에 존재하던 곡이잖아요. 그런데 라이브로 부르라니, 심지어 대학 축제라니까 더 놀라웠죠. 알고 보니까 당시 애니메이션을 보던 어린아이들이 다 커서 저를 찾아준 거였더라고요. 동심을 파괴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좋기도 하고 놀랐어요. 유튜브에서 직캠을 봤는데 댓글에서 다들 울고 있더라고요. (웃음) 저도 괜히 울컥했죠.
성우님 목소리가 타임머신 버튼인 사람이 많아요. 성우님에게도 추억을 되살리는 버튼이 있을까요?
그럼요. 저도 어렸을 때 만화를 보고 자랐잖아요. <들장미 소녀 캔디>나 <요술공주 밍키>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따라 하고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아직도 그 캐릭터를 보면 목소리가 생각나요. 아이들이 왜 저를 보면서 추억이 떠오른다고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언젠가 제 유튜브에서 ‘추억 속의 성우’라는 특집으로 그때 더빙해주신 분들 인터뷰를 해보고 싶어요.
최근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서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인생 마일리지를 쌓으셨다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자신의 선택을 믿을 수 있었던 힘이 궁금해요.
30대까지는 나 자체를 믿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엉망진창이지만 곧 일어날 거야’하는 믿음도 있었고요. 삶이 힘들거나 복잡할 때 특히 일기를 많이 썼어요. ‘이런 상황이 생겼는데 어떡할래? 끝났지 뭐’ 하다가도 ‘아니야 잠깐만, 이러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혼잣말하듯 쓰면서 답을 찾아갔어요.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며 나를 믿었죠. 지금은 철이 든 건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기회를 준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에 재능을 펼칠 수 있었구나, 주변에서 많이 도와준 덕분에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관점이 변하면서 내 재능으로 타인에게 도움 주는 방법을 찾게 됐죠. 그저 목소리 좋은 사람이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하면서요.
그래서인지 2019년부터 한국예술원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달라진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성우 개념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강의하신다고요.
이제 대변혁의 시기죠. AI가 일상에 너무 많이 들어와서 성우라는 직업이 없어지냐 마냐 고민하는 시점이 온 것 같아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예상했던 시기보다 빨리 왔어요. 유튜브를 봐도 AI 목소리를 활용해서 영상을 만드는 분이 많더라고요. 굳이 사람을 쓸 이유가 없는 거예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더빙할 때 저희를 찾긴 하는데 요즘 어떤 목소리로 단어 몇 개만 학습시키면 그 음성을 따라 모든 대사를 하는 기술이 있더라고요. 목소리는 초상권이 없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써도 막을 수 없는 거죠. 이럴 때일수록 내 콘텐츠를 만드는 창의적인 성우가 각광받을 거라고 생각해요.
유튜브도 그런 의미에서 시작하신 건가요?
그렇죠. 성우는 감독이나 기획자에게 선택받아야 일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작품이 없으면 마냥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유튜브는 내가 주체적으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잖아요. 성우라는 직업에 갇히기보다 영역을 넓히기 위해 구성부터 기획, 멘트를 짜고 편집까지 직접 해서 올렸죠. 지금은 편집해주시는 분이 따로 계신데 제가 자막 구성이나 컷 편집을 어느 정도 정리해서 작업하는 편이에요.
성우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 교수, 작가까지 다양한 일에 많이 도전하셨는데요. 끊임없이 시도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궁금해요.
계획을 세울 때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된 미래를 상상하면서 계속 도전하고 안주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안정적이고 편안한 게 좋지만 그럼 재미없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걸 그리면서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20대 때 행복의 기준은 ‘인정받는 것’이었다고요. 현재는 어떤 건가요?
앞에서 잠깐 얘기했듯 그때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내 성취만 중요하게 여겼거든요. 다른 사람은 안 보였죠.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 봐요. 지금은 나로 인해 누군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요. 성우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 자체가 매력적인 존재로 남고 싶어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에요.
성우님 인생의 가장 멋진 마법은 무엇인가요?
당연히 목소리죠. 목소리를 통해서 시간 여행을 하거나 용기를 얻기도 해요. 때로는 날카로워서 좌절하고 쓰러지기도 하죠. 마법이라는 말이 만화적 표현 같지만 굉장히 철학적이에요. 제 유튜브에 ‘띵소리를 찾아서’라는 코너가 있는데요. 목소리로 일하는 분과 얘기를 나누는 콘텐츠예요. 공통 질문으로 목소리가 어떤 의미냐고 물으면 영혼, 날개, 선물 등 온갖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문득 생각났는데 나중에 목소리가 갖는 의미를 가장 멋진 말로 정의해서 묘비명에 새기고 싶네요. (웃음)
앞으로 성우님의 뉴 퓨처(New Future)가 궁금해요.
장기적으로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어요. 지금 한류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분이 우리말에 쉽고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 기초나 발음도 중요하지만 연령대별 말투, 직업별로 다른 멘트를 알려주면 너무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차근차근 준비 중이에요.
마지막으로 성우님 마음을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캠퍼스플러스》 독자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안정성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가능성을 찾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더 기대를 해도 돼요. 인생은 즐거워야죠. 내가 흥미를 느끼는 걸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여러 경험을 많이 해봐야 알죠. 저는 극강의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개인적으로 등산을 정말 싫어했어요.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올라가는지 이해가 안 됐거든요.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싫어하는 일에 한 번만 도전해보라는 조언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들으며 등산했죠. 한 번 정복하고 내려오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이렇게 싫어하는 것도 해낸 사람이야. 그러니 좋아하는 건 얼마나 잘하겠니.’ 가끔은 지루하고 힘든 것도 해봐야 재밌는 걸 만났을 때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요. 좋아하는 일만 해도 어느 순간 지치거든요. 또 나이 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해요. 어린 친구들이 나이를 먹으면 어딘가로 사라지는 느낌이 들거나 주류에서 비주류가 되는 거 아니냐고 묻는데요. 그럴 때마다 저는 20대로 돌아가라고 하면 안 돌아갈 거라고 얘기해요. 가장 치열하고 힘든 시기잖아요. 계속 배우고 채워나가면서 열심히 산다면 나이 들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아질 거예요.
PROFILE
출연 작품
애니메이션
투니버스 성우 공채 5기 EX-DRIVER 여학생1로 데뷔 (2003)
달빛천사 - 루나 / 풀문 역
짱구는 못말려 - 채성아 역
명탐정 코난 - 정보라
개구리 중사 케로로 - 앙골 모아 역
나루토 - 테마리 역
닌자보이 란타로 - 신베 역
캐릭캐릭 체인지 - 아무 역
라이온 수호대 - 카이온 역
모아나 - 시나 역
외 다수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 아리 역
메이플스토리 - 엔젤릭버스터 / 세렌 역
스타크래프트 II : 자유의 날개 - 노바 테라 역
던전앤파이터 - 여거너 역
앨범
Type Control Yongshin (2010)
Returned Fullmoon (2019) |
CREDIT
글 양지원 기자
사진 이용신 제공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