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뭐래?’ 물음에 섬세한 답을 준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정끝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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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시의 힘을 알아가던 대학 시절, 어느 계절엔 가방 한 켠에 짙은 녹색 시집이 자리했다. 책의 이름은 《은는이가》, 시인 이름은 ‘정끝별’. 겉에 쓰인 것부터 시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데 그 속은 어떨까 두근거렸다. 시인으로서 35년, 이화여대 교수로서 9년째 독자와 학생을 만나는 정끝별 시인의 이야기를 옮기며 당시 설렘이 생각났다. 그를 ‘교수님’으로 만나 시를 배우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부러워진다.
안녕하세요. 《캠퍼스플러스》 대학생 독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5월 초, 등단 35주년에 일곱 번째 시집 《모래는 뭐래》를 출간한 시인 정끝별입니다. ‘이대 나온 여자’고요. (웃음) 현재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 현대시에 관한 모든 걸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래는 뭐래》 시집 출간과 2021년 현대시작품상 수상도 축하드립니다. 수상 작품들이 이번 시집에 실려있기도 한데요.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래는 뭐래》를 더 많은 독자가 읽어줬으면 해요. 시집 1부에 ‘이 시는 다섯 발톱의 별 시입니다’라는 시가 있는데, 11쪽에 달하는 길이입니다. 제가 쓴 시 중 가장 최근에 발표했고, 가장 길어요. 이전과 다른 호흡과 감각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다 때려 넣어 휘몰아치듯 썼습니다. 그래서 제일 애착이 가요. “여전히 나는 제 별자리 하나 찾지 못하는 별치!”라는 구절이 떠오르네요. 늘 가장 최근에 쓴 시가 가장 좋은 시였으면 좋겠다는 ‘뚱뚱한 꿈’을 가지고 있어요.
언제부터 시에 관심이 생기셨나요?
고등학생 때 국어를 제일 잘해서 자연스럽게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죠. 시를 쓰기 시작한 건 대학에 들어온 1983년부터예요. ‘이화문학회’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스무 해 남짓 알던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사랑·삶·사회·시대·시간 그 한가운데에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죠. 선한 의지를 담보하는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과정이기도 했고요. 시를 쓰면서 부끄러움을 알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믿음이 들곤 했으니까요. 그 이후로 시인이 되길 꿈꿨고, 지금까지도 시를 쓰고 있네요. 시는 저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지도이자 사람과 함께 하는 미래였어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랬으면 해요.
교수님께 시는 어떤 의미인가요?
제 장기는 근기(根基)와 의리예요. 근기는 선친이 물려주셨고 의리는 동료 시인이 일러줬죠. 스무 살이 되어 생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 바로 시였는데요. 그때는 정말 시인 외에 되고 싶은 건 없었어요. 그 첫 선택에 대한 근기와 의리를 다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더 깊은 속내는 “시 속에서야 쉴(‘집필을 선언한 시인’ 중)”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 안에서 숨을 쉬고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시는 산소발생기, 공기청정기, 공기정화식물 같아요. 시를 쓰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맑아지고, 나다워져요. 시에 관한 한 아직 끝을 보지 못해서 늘 시가 고프고, 그 고픔이 시를 쓰게 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힘을 가진 시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모든 글쓰기가 그렇지만 특히 시는 자기로부터 출발해 자기로 향하고, 창조하며 창조된 자신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언어와 행동이 함께 가야 해요. 결국 잘 살아내는 게 관건이죠. 그게 출발점이자 도착점일 겁니다. 시와 제 삶을 일치시키려 노력한다는 점이 매력이에요. 대학생 때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를 읽으며 ‘사물의 꿈’이라는 말에 꽂혔었는데요. 시인은 사물이 꾸는 꿈을 꾸고, 건네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믿어요. 하물며 사람의 꿈이나 말은 어떻겠어요. 꿈을 잘 꾸고, 잘 들으려면 귀 기울이고 배려하는 게 기본일 텐데요. 거기에도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와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언어가 가진 힘, 특히 시의 기반인 모어(母語)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시를 쓰는 건 어렵습니다. 모어는 밥이나 공기, 딛고 선 땅과 같은 것이라 정신적 토대가 됩니다. 특히 시인에게는 호흡과도 같아요. 저에게 그런 모어는 한국어고요. 어릴 적부터 언어에 많이 노출된 환경에서 자랐어요. 독특한 순 한글 이름 덕분에 제 이름의 소리와 의미, 생김새에 귀 기울이면서 생긴 한글에 대한 흥미가 자연스럽게 모어를 향한 관심으로 이어졌어요. ‘시는 부족의 언어’라는 문장을 접하고 한글의 가능성을 최대한 살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죠. 한글의 가능성은 이제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해방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우리 말과 글이 일치하기 시작했어요. 한글로 정규교육을 받고, 한글로 생각과 뜻을 말하고 쓰기 시작한지 불과 80년도 되지 않았고요. 그러니 앞으로 한글의 역량은 무궁무진할 겁니다. 일례로 제가 고등학생일 때는 우리 현대시에서 압운, 즉 라임(rhyme)이 형성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배웠어요. 하지만 랩(rap)이라는 장르가 주목받으면서 달라졌죠. 이제 한글만큼 재밌는 라임을 만들 수 있는 언어는 없다고 느껴질 정도예요. 이렇듯 한글과 한국 시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기억에 남는 강의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생각하자면 너무 많겠지만 교수자로서 미숙했던, 그래서 아팠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네요. 3~4년 전, 시 창작 수업 첫 합평회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이라 나름 부드럽게 진행했음에도 시를 처음 써본 학생은 부족한 점을 더 많이 지적받았어요. 합평회 후 한 학생이 거의 울면서 ‘창작의 변’을 얘기하더라고요. 너무 소중했던 반려견의 죽음을 기억하며 처음 써본 시였대요. 그 모습을 보니 제가 가해자가 된 기분이 들었어요. 짐작건대 본인 감정을 평가받았다고 생각했던 듯해요. 그리고 다음 시간에 수강을 철회해 버리더군요. 시가 무엇인지, 시를 쓰고 읽는 것, 시 쓰기를 가르치는 게 무엇인지, 시에 관한 학습과 교습의 태도 등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었어요.
교수, 시인으로서 역할에 어떤 차이가 있으신가요? 교육자로서 갖고 계신 가치관도 궁금합니다.
교육자보다는 시인으로서 정체성이 더 강한 듯합니다. 하지만 두 역할을 오래 오갔기 때문인지 이제는 둘이 그다지 다르지 않게 느껴져요. 자신에게, 가족에게, 나를 아는 사람에게 덜 부끄럽게 살아야 하고, 시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울력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교육자로서는 ‘시심(詩心)’과 ‘시Q’를 전도하는 시 해설자·전도사·중개사·설계사 등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시적 인프라가 구축돼야 독자와 시장이 살아나고, 재능 있는 젊은이가 시인이 되고 싶어 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시를 양산하는 선순환구조가 형성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죠. 시가 살아있는 사회가 곧 사람이 살 만한 사회입니다.
마지막으로, 후배이자 제자인 학생들에게 바라는 점을 말씀해 주세요.
지금까지 저를 움직인 건 끝없는 호기심과 지지 않는 근기였어요. 그 동력에 의지해 시를 써왔고, 시가 그 동력을 활성화하기도 했죠. 만인의 평등·만물의 상생·만유의 자유, 이런 유토피아야말로 시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가치예요.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일도 마찬가지고요. 성평등, 다양한 성의 상생과 자유는 우리 사회가 꿈꾸어야 할 지향점이기에 사회의 절반인 여성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강요·불의·폭력들부터 없어져야겠지요. 그러려면 먼저 저항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미(美)연방 여성 대법관 故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인용했던, 1837년 노예제와 여성 차별제도에 반대하던 한 여성의 발언이 기억납니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 남성 사회 구성체 전원이 이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여성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죠. 그러기 위해 여성은 독립적으로, 실력을 키우고 억압에 반대하면서 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약자와 소수자를 존중해야겠죠.
PROFILE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경력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4~현재)
수상
《문학사상》 시 부문 당선 (1988)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1994)
제2회 유심작품상 시 부문 수상 (2004)
제23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2008)
제16회 청마문학상 (2015)
제22회 현대시작품상 (2021)
저서
《은는이가》 (2014)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2019)
《모래는 뭐래》 (2023)
외 다수 |
CREDIT
글 김혜정 기자
취재 권채린 인턴기자
사진 정끝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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