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한 땀, 이야기를 수놓다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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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자들>, <암살>, <아가씨>, <신과함께>, <미스터 션샤인>... 그녀가 작업한 작품들을 다 말하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지 않을까. 그만큼 내로라하는 영화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저 운이 좋았다 말했지만,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의상디자인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열정이 그 이유임을 알게 해준다. 사람들 앞에서 뻔뻔하고 건방지기 위해, 보다 많이 공부하고 자기 검열한다는 이 사람. 솔직히 너무 멋있다. 
 

‘영화 의상디자이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로 손꼽힙니다. 한 분야에서 본인의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2001년도에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로 영화 의상 작업을 시작했어요. 당시 영화에 대해 잘 몰랐지만,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작품을 함께 하게 됐고, 그분들 덕분에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워낙 학교 다닐 때부터 웬만하면 거절을 안 했어요. 작업 제안이 들어오거나 손이 필요하다고 하면 무리하면서도 일을 하는 편이었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주변에선 저보고 ‘워커홀릭’이라고 하죠. 전에는 아니라고 했는데, 마흔 넘어서 보니까 이 정도면 워커홀릭 맞는 것 같아요.(웃음) 

의상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무대미술과를 전공하면 무대, 조명, 의상 등으로 세분화해서 배워요. 제 경우 디자인은 가능한데 뭔가를 기술적으로 제작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조명은 빨리 포기했고요. 자연스럽게 의상 쪽 수업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재밌더라고요. 그때 당시 저희 과 학생이 10명 안팎이었는데, 대부분 무대 파트로 빠져서 조명이나 의상 맡는 친구들이 한두 명밖에 없었어요. 의상 작업할 사람이 없다보니 제가 의상 수업을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작업이 몰렸죠. 한 학기에 교내 공연이 20개가 넘었고, 제가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이 작업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한 번에 많은 작업을 하는 게 훈련됐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의상 작업하던 게 지금까지 이어져 제 분야가 된 거죠.

의상디자이너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요? 
작업 제안이 들어오면 시나리오를 보며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눠요. 어느 정도 틀이 잡히면 그걸 토대로 각 의상 콘셉트를 짜죠. 이후 프레젠테이션하면서 제안과 피드백을 거쳐요. 촬영감독님, 미술감독님 등 핵심 스태프들과 회의를 자주 합니다. 그 과정으로 최종 콘셉트가 정해지면 의상을 제작하고, 피팅과 테스트 촬영을 거쳐 실제 촬영에 들어가죠. 작품마다 작업 기간이 다른데, 스케일 큰 영화의 경우 보통 5개월이 걸려요. 여러 작품을 맞물려서 하는 편이라 1년에 평균 8개의 작품을 로테이션 하고 있죠. 

작업에서 가장 중점을 두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시나리오죠. 패션디자이너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옷을 만든다면, 의상디자이너는 갓난아기 배냇저고리부터 수의까지 이야기 속 모든 의상을 다 다뤄야 해요. 예를 들어 <미스터 션샤인>의 경우,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한복과 양복, 기모노와 치파오, 미국과 스페인 군복까지 만들어야 했어요. 또 시나리오를 보면 지문 속에 인물에 대한 묘사가 들어있는데요. 그걸 꼼꼼히 분석해서 캐릭터의 특징을 잡아내고, 이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디자인 작업에 들어가요. 간혹 그 옷이 꼭 필요한지 물어보고 상황에 따라 다른 걸 제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의상디자인의 시작은 시나리오죠. 내가 만들고 싶은 옷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에도 저희가 만든 의상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배우들에게 잘 맞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준다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공연, 영화, 드라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업을 하셨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나 작품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솔직히 제겐 다 똑같아요. 의상이란 영화 속 세계를 관객들이 믿고 이해하게 만드는 거잖아요. 때문에 왕의 옷이든, 노비의 옷이든 누가 입었고, 무슨 옷이고, 얼마나 멋진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의상에서는 단역과 주인공의 구분이 없죠. 그래서 특별히 어떤 캐릭터나 작품에 더 많은 애정을 쏟지 않아요. 다만 이런 경우는 있어요. 영화 <후궁>을 보면 ‘밀궁’이라는 지하 공간이 나와요. 그곳에 오랫동안 갇혀 지낸 한 궁녀가 화연(조여정 분)에게 다가가는 장면이 있었어요. 단역이라 캐릭터에 대한 정보가 없지만 옷을 만들어야 하니 제 나름대로 스토리텔링을 가미했죠. ‘한때는 왕의 사랑을 받았을 예쁜 궁녀’라는 역할을 주고, 그에 맞춰 옷을 만드는 게 재밌었어요. 영화 <군도>의 민초들과 병사들도 같은 경우죠. 알고 보면 각자 다른 사연을 가졌을 거잖아요. 그걸 상상하며 옷을 만들었던 게 기억나네요. 

반면 가장 어려웠던 작업을 꼽으신다면 무엇일까요? 
이번에 작업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9월 한 달 준비하고 10월부터 촬영을 시작해 24회까지 같이 가는 일정이었거든요. 드라마 작업은 처음인데다 대본이 나옴과 동시에 촬영이 이뤄지다 보니 당장 촬영 들어갈 의상 준비하랴, 다음 대본 확인하고 제작하랴 정신없었죠. 캐릭터와 작품 전체 분위기를 보면서 의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뒷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옷을 만든다는 게 굉장히 어렵기도 했고요. 특히 옷 한 벌에 최소 두 달이 걸리는데, 극중 유진(이병헌 분)의 군복은 제작만 3개월이 넘었어요. 유진의 촬영을 좀 미루고 애신(김태리 분)의 분량부터 뽑아야 했죠. 그때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몰라요.(웃음)

의상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요?
근성과 안목이요. 이 일은 아무리 해도 수월해지지 않아요. 매번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가 나타나잖아요. 예를 들어 영화 <신과함께>의 지옥대왕 캐릭터는 전에 없던 형태라 처음부터 의상을 만들어내야 했죠. 전 지금도 시나리오를 받으면 ‘이건 또 뭐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매번 새로워요. 그래서 버티는 근성이 필요해요. 또 의상디자인은 여러 안들 중에서 어떤 게 나은지 골라내는 작업이에요. 자기 취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내 안목을 믿을 수 있어야 감독에게 의견을 제시하고, 설득하고, 타협할 수 있어요. 그래서 때론 디자인 능력보다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중요할 때도 있죠. 마지막으로 정말 이 일을 꿈꾼다면 꼭 영화를 공부하세요. 영화 의상 만들고 싶다고 면접 보러 오는 분들 중에 시나리오를 보고 오는 경우는 100명에 1명 정도예요. 인터넷 검색만 해도 시나리오를 볼 수 있어요. 또 영화 공부할 때 여러 편을 감상하는 것보다 좋은 영화 한 편을 10번 보는 걸 추천해요. 최소한 그 영화가 왜 좋은 영화인지 알 수 있을만큼요. 

캠퍼스 플러스를 읽는 20대 청춘들에게 조언 한 마디.
좀 뻔뻔하고 건방졌으면 좋겠어요. 겸손하려다 남들에게 끌려 다니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 남이 칭찬해준 그림도 제 맘에 안 들면 찢어버렸어요. 내 일에서는 내가 제일 중요한 법이잖아요. 남의 평가에 너무 휘둘리지 마세요. 물론 그렇다고 건방만 떨면 안 돼요. 사람들 다 떠납니다. 내가 뻔뻔하려면 그만큼 실력을 쌓아야 해요. 제 일은 특히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더 뻔뻔하게 나가요. 대신 이를 위해 감독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정보를 찾고 어떤 질문을 받아도 대답할 수 있을만큼 준비해요. 그래야 내 주장이 관철되고 사람들이 나를 신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전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면 잠을 못 자요.(웃음) 소심하거나 위축되어 있기보다는 차라리 일 저지르고 뻔뻔하게 행동하는 게 낫다고 봐요. 지금 아니면 언제 그러겠어요.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일이 주어지면 어떻게든 다 해요. 뻔뻔하다는 그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참여한 작품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영화 <올드보이>(2003)
영화 <달콤한 인생>(2005)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영화 <괴물>(2006)
영화 <타짜>(2006)
영화 <만추>(2010)
영화 <후궁 : 제왕의 첩>(2012)
영화 <신세계>(2012)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2014)
영화 <상의원>(2014)
영화 <암살>(2015)
영화 <베테랑>(2015)
영화 <내부자들>(2015)
영화 <검사외전>(2015)
영화 <아가씨>(2015)
영화 <더킹>(2016)
영화 <군함도>(2016)
영화 <택시운전사>(2017)
영화 <남한산성>(2017)
영화 <신과함께-죄와 벌>(2017)
영화 <인랑>(2018)
영화 <신과함께-인과 연>(2018)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
외 다수다

수상
제 44회 대종상 영화제 의상상 
제 18회 부일영화상 미술상 
제 2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기술상 
제 51회 대종상 영화제 의상상 
제 52회 대종상 영화제 의상상 
제 36회 청룡영화상 기술상 
제 11회 아시안 필름 어워드 최우수의상상 
제 55회 대종상 영화제 의상상
취재_임수연 기자, 박예지·하서빈 학생기자 사진_안용길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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