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도, TV도 없던 1945년 8월 15일
어떻게 해방의 자유를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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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하면 어떤 순간이 떠올라?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만세를 외쳤던 광복절일 것 같아.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소식을 접하기 어려웠을 텐데 우리 민족은 어떻게 해방을 알았을까? 광복절을 맞아 해방 뒷이야기를 전해줄게.
쥐 죽은 듯했던 해방의 날
1945년 8월 15일 정오, 4분 37초 동안 일왕 히로히토(裕仁)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울려 퍼졌어. 일본 패전선언문을 낭독한 방송이었지. 나쁜 음질과 난해한 용어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해석과 번역을 기다려야 했어. 패전이나 항복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말했기에 상황 파악이 어려웠거든. 그토록 바라던 해방의 순간이지만 만세는커녕 대부분 사람은 이를 알지도 못한 거야. 당시 경성 주재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의 배우자이자 한국학을 연구했던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Fania Isaakovna Shabshina)는 ‘쥐 죽은 듯했다’고 표현했어.
마침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8월 15일 오후 여운형,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어. 뒤늦게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이 서대문형무소 앞으로 몰려들었지. 독립운동을 하다 억울하게 수감된 이들이 풀려났거든. 2005년 방영한 KBS 다큐멘터리 <8.15의 기억>에서 당시 신문기자셨던 이기형 님은 이렇게 증언하셨어. “감격의 도가니지. 촛불 들고나오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해. 만세 부르고 껴안고, 굉장했지.”
다음날 오전 11시 무렵 휘문중학교에서 열린 여운형 연설을 시작으로 광화문까지 대규모 만세 행렬이 이어졌어. 마침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순간이야.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는 광복의 순간을 직접 경험하신 40분 이야기를 담았는데, 태극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더라. 증언에 따르면 그때는 태어나서 태극기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대. 일장기 위에 파란색 물감으로 태극기를 덧그려서 만세를 외치러 나간 사람도 많았다고 하고. 35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 영향이지. 오후 5시 중앙방송국은 최초로 애국가를 방송했어. 지금 우리가 아는 노래와 달리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만 붙인 형식이었지만 비로소 해방을 체감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만감이 교차하던 중국 충칭에서
1945년 8월 10일 저녁,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충칭의 신문사와 방송사는 급하게 ‘일본이 무조건 투항한다’라고 보도했어. 조국 해방이 머지않았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는 마냥 기뻐하지 못했어. 오랫동안 준비한 광복군 국내 침투를 기다리던 중이었거든. 김구는 백범일지에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써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라고 적기도 했지.
일본,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대만 등 많은 나라에서 동시 방송한 패전선언문 낭독에 대한 반응은 어땠냐고?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자동은 충칭 시내가 만세 열창이었다고 회상했어.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폭죽과 환호성이 터졌고,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호외가 날렸대. 고대하던 해방 소식에 임시정부 요인은 귀환을 서둘렀지만 11월 말에서야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지.
가깝고도 먼 일본에서 가슴 깊이 외친 말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어떤 반응이 있었을까? <아사히 신문>은 사전에 ‘15일 정오 중대 방송이 있으니 엄숙히 청취하라’라는 보도를 냈지. 지지직거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일왕 목소리와 해설 방송이 끝나자 일본인은 충격에 휩싸였어. 넋이 나가거나 대성통곡을 하며 항복을 믿지 않으려 했대.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동포들은 목소리를 높여 기뻐하기 어려웠을 거야.
8월 31일, 첫 귀환선이 일본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어. 해방 직후에는 일주일 이상 기다려야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대. 작은 고기잡이배를 타고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 이듬해 3월까지 일본에 머물던 220만 동포 중 약 135만 명이 귀국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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