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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은 언젠가 다음 단계로 넘어서는 동력이 되고, 끝내 열매를 맺는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요”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은 사회 분위기가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었어요. 부모님은 의대나 법대처럼 안정된 길을 가서 집안을 더 왕성하게 일으켜야 한다고 압박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미대에 진학해 예술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식구들 모르게 서울대학교 서양학과를 지원했는데 떨어지고, 국민대학교 장식미술학과에 입학한 게 패션 디자이너가 된 계기가 됐죠. 장식미술학과는 지금으로 보면 응용 미술로, 그래픽 디자인, 시각 디자인, 공업 디자인을 다 배웠어요.
장식미술학과에서 의상 디자인 수업도 들으셨던 건가요?
의상 디자인은 의상학과에서 가르쳤어요. 그런데 제가 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여학생만 의상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국민대에 입학한 뒤, 의상학과에 남학생 입학도 허가해달라고 건의했지요. 본래 제가 구제 옷에 직접 염색해 입을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거든요. 학교에서도 제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당장 제도를 바꿀 수 없으니 의상학과는 부전공으로 하라더군요. 이후 3학년 때 비로소 남학생도 의상학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됐어요.
이후 ‘캠브리지’에서 경력을 시작하셨어요. 남성복 디자이너가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졸업 뒤 남성복 브랜드 ‘캠브리지’와 여성복 브랜드 ‘반도패션(엘지 패션의 전신)’ 두 군데를 시험 봐서 합격했어요. 당시 여성복엔 이미 훌륭한 선배들이 많이 계셨지만, 남성복엔 본보기가 될 만한 선배가 거의 없었어요. 힘들더라도 남성복 시장을 개척해보겠다는 마음이 있었지요. 또 다양한 룩을 시도해서 내가 봤던 이탈리아나 유럽의 남자들처럼 우리나라 남성들을 멋지게 바꿔보고 싶었고요.
‘캠브리지’, ‘제일모직’, ‘논노’ 등 유수의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으셨어요. 탄탄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선생님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으셨을까요?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고, 성실히 일하고, 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첫 회사인 ‘캠브리지’에 막내로 입사했을 때예요. 회사에 부자재, 단추, 원단 회사 등 거래처 사람들이 자주 왔어요. 그런데 그들이 업무를 마치고 갈 때 배웅하는 디자이너가 거의 없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인사만 까닥하는 게 고작이었지요. 저는 매번 현관까지 배웅하고 살펴 가시라고 인사를 드렸어요. 그랬더니 거래처 분들이 다른 패션 회사에 가서도 ‘캠브리지’에 가면 디자인 잘하는 애가 있다며 소문을 내주시는 거예요. 당시 팀에서 막내인 제가 특별한 디자인을 했겠어요?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말씀을 해주신 거죠. 그 덕에 ‘캠브리지’에서 근무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제일모직’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수석 디자이너가 됐어요. 밤 열두 시가 넘어 퇴근하고, 남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하는 등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이후 ‘논노’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는데, 상사가 저를 불러서 ‘꼭 잡고 싶지만, 큰물로 가보라’며 격려해주셨어요. 그 덕에 제가 안목을 높이고 더 성장할 수 있었지요.
1987년에 남성복 브랜드 ‘카루소’를 론칭하셨어요. ‘카루소’가 연예인들의 브랜드로 발돋움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카루소를 열고 석 달쯤 되었을 때, TV에서나 보던 조용필 씨가 매장에 찾아왔어요. 슈퍼스타인 조용필 씨를 매장에서 직접 보니까 너무 놀라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요. 본인의 옷을 전담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로부터 10년간 조용필 씨 옷을 거의 카루소에서 만들었어요. 덕분에 저는 슈퍼스타 디자이너가 됐죠. 당시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던 MBC <십대 가수왕>에 출연하는 10명 중 9명은 저희 매장 옷을 입었어요. 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김원준 씨의 치마, 소방차의 승마 바지도 다 카루소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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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30년 넘게 옷을 만들고 계세요. 늘 현역으로 일하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패션은 고리타분하면 안 돼요. 신선하고, 호기심을 끌고, 트렌디해야죠. 그러려면 눈과 귀를 안테나 기지국 삼아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젊은 옷을 만들려면 내 마인드가 젊어야 하거든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옷의 기본은 무엇인가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인간적이고, 일에 충실하고, 기본을 잘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준비가 미흡하고, 충실하지 않으면 그 옷은 가짜라고 봐요.
2019년 S/S 컬렉션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 2018 F/W 컬렉션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하셨어요. 패션에 역사를 접목하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제가 고전을 테마로 삼은 건 옛것을 그대로 되살리자는 게 아니라, 지금의 이슈를 고전을 통해 풀어보자는 의미가 있어요. 일례로 2019년에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저는 김시습을 떠올렸어요. 《금오신화》 중에 두 작품이 귀신과 살아있는 총각이 결혼하면서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귀신이 외부 세력의 침입을 겪을 때마다 볼모로 잡혀가고 노리개로 삼아진 여성들이지요. 저도 김시습처럼 여성의 희생을 제의적으로 달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금오신화》를 차용해 패션쇼로 풀어냈어요.
《금오신화》를 어떻게 패션으로 풀어내셨나요?
귀신과 총각이 결혼식을 올린 것에 착안해 ‘활옷’을 활용했어요. 활옷은 전통 결혼식에서 여성들이 입는 웨딩드레스이자, 평상시에는 궁중 여인들만 입을 수 있는 고귀한 옷이에요. 화려한 색상의 옷감에 자수를 곱게 놓아 만들지요. 그렇게 귀한 옷을 입혀 한을 달래주려 했어요. 다만 활옷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남자 모델에게 한복 치마를 연상케 하는 긴 드레스를 입히고 그 앞에 롱 후드티를 걸치게 했어요. 제 시도가 유니섹스, 젠더리스의 유행과 맞물려 좋은 평가를 받았지요.
그동안 늘 지켜온 자신만의 신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맛있는 것을 소식하고, 잠을 잘 자고, 술과 담배를 안 하고, 밤 문화를 안 즐겨요. 또 고민은 잘 안 하는 편이에요. 물론 좋은 옷을 만들고 싶고, 좋은 사람을 더 만나보고 싶은 고민은 많죠. 하지만 고민을 위한 고민은 하지 않아요. 욕심도 부리지 않고요. 죽을 때 아무것도 안 가져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비워지고 욕심이 없어져요. 불필요한 일은 안 하고,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려고 해요.
인생에서 후회 없는 선택을 꼽자면 무엇이 있으신지요?
결혼해서 평생의 반려를 만난 것이 첫 번째예요. 아내 덕분에 인생의 깊이를 더 느끼며 살 수 있었거든요.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거예요. 남들이 권하는 길이나 부모님이 선택해준 길을 간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길을 갔기 때문에 지금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캠퍼스 플러스 독자들을 위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성공은 사다리를 타고 쭉쭉 올라가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때론 내가 걷는 길이 내려갈 때도 있어요. 이 길이 맞는지 아닌지 몰라서 답답하고, 지겹고, 힘도 들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음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사람만이 경험하는 돌파의 순간이 있어요. 꾸준한 노력은 언젠가 다음 단계로 넘어서는 동력이 되고, 끝내 열매를 맺는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요.
PROFILE
現 카루소 대표
학력
프랑스 파리 퐁텐 블루(FOUNTAIN BLUE) 예술학교 졸업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직물디자인 석사
국민대 장식미술학과 학사
경력
서울 패션위크 참가(1992~2019)
프랑스 파리 장식미술관 국제패션아트전 전시 참여(2017)
상하이 ‘세계 예의 복식 축제’ 심사위원 및 패션쇼 참가(2013)
차이나 패션위크 한·중·일 패션쇼 한국대표 참가(2012)
파리 프레타포르테 남성복 컬렉션 참가(1994), 총 6회
파리의상조합 정회원 가입(1993)
서울올림픽 기념 국내 첫 남성복 컬렉션 개최(1988)
‘카루소’ 설립(1987)
‘캠브리지’, '제일모직', ‘논노’ 디자이너(1984~1987)
수상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섬유패션인 대상(2015)
코리아패션대상 국무총리 표창(2015)
올해의 디자이너상(2015)
문화체육관광부장관표창 올해의 디자이너상(2012)
제10회 서울패션위크 헌정디자이너 10인 선정(2010)
한국 섬유 패션 대상(2007)
한국 패션 브랜드 대상(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