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에 휩싸일 때가 있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수천 번 고민하기 일쑤지.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 명사들도 그런 과정을 통해 현재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단 사실!
우리와 같은 20대를 보낸 그들의 터닝포인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혹시 알아? 이 글이 네게 터닝포인트가 되어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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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장 구정임
‘너도 할 수 있어’
새로운 일에 도전할 확신이 생겼을 때
승무원으로 일하다 보면 가끔 비행기 조종실에 들어갈 기회가 생겨요. 바쁜 시간을 피해 조종사들과 잠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요. 한번은 기장님께서 “조종사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너도 도전하면 할 수 있어”라며 제게 조종사가 되길 권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종사가 되는 과정을 공부하게 됐어요. 학교, 비용, 선발 기준 등을 알아보면서 충분히 도전할 만한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죠. 하루하루가 도전이고 항상 새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직무 전환을 결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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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생태학자 유영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다른 인생을 꿈꾸게 됐을 때
공고 졸업 후 화력발전소에 취직했을 때만 해도 전 꿈이 없었어요.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최대 숙제였고, 퇴근 후 술 마시며 노는 게 다였죠.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공고생의 고시패스 수기가 담긴 책을 읽게 됐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며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다른 인생을 살아봐야겠다’는 도전 의식이 생겼죠. 그 책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겁니다.
그 후 법학과에 가기 위해 대학 입시를 준비했어요.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아는 건 용접 기술뿐이고, 학원에 다닐 수도 없어서 독하게 마음먹어야 했죠. 1년 동안 좋아하던 술과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회사 출근 시간 외에 나머지 시간은 계속 독학했습니다. 비록 원하던 법학과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한양대 교육공학과에 왔고, 그 덕분에 지금 한양대 교수로 활동할 수 있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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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통역사 조성현
‘기왕 할 거면 최고가 돼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추진력을 얻었을 때
저는 수어를 군대 제대하고 늦게 배웠어요. 어느 날 고향 친구가 청각 장애인 친구와 수어로 이야기하는 걸 봤는데, 너무 재밌어 보이는 거예요. 저도 그 청각 장애인 친구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러다 동국대
‘손짓사랑회’라는 수어동아리도 창립하게 됐고요. 4학년 때 수어통역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는데 화학공학 전공 교수님께서 힘들 거라며 저를 엄청 말리셨어요. 끝내 결심을 꺾지 않으니까 하신 말씀이, “원해서 하는 만큼 기왕이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돼라”였어요. 그 말이 지금까지 제가 수어통역사로 일할 수 있게 하는 힘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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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이혜훈
‘이건 잘못됐다. 맞서야 한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할 용기가 생겼을 때
1996년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하던 시절, 정말 단단한 유리천장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비서 업무를 하는 여성 연구조원이 많았는데 임신, 출산과 동시에 회사 안에서는 “거봐, 여자 뽑지 말랬잖아”라는 비아냥이 나오곤 했습니다. 셋째를 갖게 된 저 역시 회사 분위기 때문에 출산 당일까지 임신 사실을 밝히지 못했지요.
믿기지 않겠지만 저는 회사에서 산행을 가다 말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분만 후에 바로 직장 상사에게 전화했더니, “임신했었어? 그럼 출산 휴가 쓰는 거야?” 크게 화내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홀로 8개월을 버틴 저에게 어떤 위로나 축하도 없었지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건 잘못됐다. 바꿔야 한다’
그때부터 사회를 바꾸는 일에 관심을 두고 이곳저곳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법안 하나 낼 수 없고, 1년 반을 쫓아다녀도 국회의원 도장 한 번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치권에서 제안이 들어왔고, 세상을 바꾸는 방법 중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정치를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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