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지로’가 된 을지로
그 뒤에 숨은 본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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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목마다 감성을 자극하는 을지로.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에는 알록달록한 색이 덧대졌고 50년도 넘은 건물들이 뉴트로 감성을 완성하지. 세운상가 입구의 ‘당신의 발길을 멈춰, 세운’이라는 전광판을 볼 때마다 정말 발길을 멈추게 돼. 그런데 우리가 힙지로라고 알고 있는 세운상가 일대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뻔했어. 을지로가 어떻게 힙지로로 부활했을까 궁금하지 않아?
우리의 발길을 멈춰 세운, 힙지로의 시작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인 세운상가가 들어서면서 을지로는 호황을 누렸어. 그런데 강북과 강남의 불균형이 심화되자 정부에서 1970년 11월 신시가지 개발 계획을 발표하며 원도심 과밀 억제정책을 시행했지. 그 일환으로 1970년대 강남개발이 시작됐고, 1987년에는 용산전자상가가 문을 열었어. 세운상가에 모여 있던 전자 업종이 용산으로 옮겨가면서 을지로 일대가 쇠퇴했지. 2006년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세운상가 일대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했지만, 2008년 국제금융위기가 겹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 박원순 전 시장 취임 후에는 철거 계획이 무산되고 ‘세운상가 일대 도시재활성화계획’이 추진됐어. 하지만 이런 계획들이 지지부진해지고, 인터넷을 통한 유통이 확대되면서 을지로 일대의 상인들이 하나둘 떠났어.
발길이 끊이지 않던 을지로는 어느새 단골손님도 찾지 않는 쓸쓸한 공간이 됐지.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의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 따르면 세운상가의 공실률은 70%에 달했대. 2015년, 서울시가 세운상가의 역사와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다시세운 프로젝트’에 착수하면서 반등의 기회를 얻었어. 폐허가 된 것만 같았던 을지로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이, MZ세대에게는 신선한 오브제로 가득한 감성 플레이스로 거듭난 거야.
어르신부터 새내기까지, 을지로에 번진 ‘힙’한 물결
'다시세운 프로젝트’는 뭐든지 제작해주는 세운 상가 내 가게들의 특징을 내세워 시제품 제작을 지원하는 ‘세운메이드’ 사업을 성공시키며 세운상가 부활의 서막을 올렸어. 세운상가에서 열린 독특한 전시와 워크숍 등에도 발길이 끊이지 않았지. 그 결과 세운상가의 공실률이 20%대로 회복됐지. 시설이 정비되자 을지로만의 감성과 저렴한 임대료의 매력에 청년창업주들이 모이면서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어. 지금 을지로는 완전히 새로워졌지. 쓸쓸하고 어딘가 스산하기까지 했던 을지로는 사라지고 오래된 건물에 깃든 새로움이 매력적인 ‘힙’한 공간이 됐어.
2017년 문을 연 뉴트로 컨셉의 카페 ‘호랑이’는 을지로의 대표 명소로 손꼽는 곳이야. 이세준(36) 카페 사장님과 을지로의 변화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눠봤어.
쇠퇴한 공간으로 여겨졌던 을지로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랜 역사가 담긴 을지로가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긴 세월과 함께한 을지로에는 아픔, 슬픔, 상처, 사랑, 추억들이 담겨있는데, 그게 결국 우리 삶의 모습이니까요. 이 공간에 담긴 감정과 세월이 주는 매력에 빠진 거죠.
카페 ‘호랑이’는 힙지로의 대표 명소로 여겨지는데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한글 간판이 한몫한 것 같아요. 정갈하게 적힌 호랑이 세 글자가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해요.
힙지로로 부상한 을지로 일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감사하지만, 모든 변화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아요. 30년 넘게 을지로를 지키고 계셨던 분들이 쫓겨나고 있어요. 몇몇 분은 새로 들어온 가게들 때문이라고 언성을 높이며 속상해하시기도 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죠. 을지로는 삶의 터전이에요. 그 안에 담긴 것들을 잃으면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어요.
감성 뒤로 사라지는 진짜 을지로
우리가 힙지로라고 알고 있는 을지로 일대는 사실 도심 제조노동업의 중심지야. 1960~70년대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공장도, 그의 동상이 세워진 곳도 바로 세운상가야. 지금은 인스타 감성의 명소들이 즐비한 곳으로 더 유명하지만, 여전히 주얼리 가공, 봉제, 제화 등의 제조업 노동자들의 터전이지.
이곳의 제조지구는 상권이 형성된 초기부터 상점들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A가게에서 공구를 팔고, 가까운 B가게에서 용접을 하고, C가게에서 물건을 고치려면 D가게에서 부품을 사야 하는 식이야. 그러니까 A가게의 붕괴가 B, C, D가게의 붕괴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거지. 그런데 재개발로 을지로의 본 모습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어. 202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다시 취임하면서 기존의 도시재생사업을 멈추고 재개발의 의지를 밝혔거든. 서울시는 재개발 기간 동안 상인들의 안정적인 영업을 보장하기 위해 대체 영업장을 설치하겠다고 했어. 그래도 노동자들의 근심과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홍영표 한국산업용재협회 서울지회장의 2021년 12월 23일 경향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아직 ‘가든파이브의 상처’가 짙게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해.
가든파이브의 상처는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비롯됐어. 2003년 복원사업이 진행될 당시 상권의 붕괴를 우려한 상인들은 재개발을 격렬하게 반대했고, 서울시는 상권 보호를 약속했지. 공사 기간에 상인들에게 대체 영업장도 제공하고, 가든파이브라는 종합 쇼핑센터를 건설해 접근성을 높이겠다고 말했어. 하지만 상인들의 요구사항과는 다르게 지어진 상가와 높은 공실률 때문에 청계천 상권은 무너졌고, 상인들은 생업을 잃었지. 또다시 가든파이브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걸 막으려면 진정한 상생을 위한 재개발이 필요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끝까지 더 지켜봐 줘. |
CREDIT
취재 정예은 학생기자
사진 정예은 학생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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