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과잉 시대에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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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심지어는 내가 원치 않아도 실시간으로 참상을 목격하기 쉽다. 텍스트가 아닌 사진과 영상으로, 뉴스가 아닌 개인에 의해 퍼져나간다. 이미지 과잉 시대에서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법을 고찰해본다.
고통을 타자화하는 '빈곤 포르노'
얼마 전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는 말이 각종 헤드라인을 장악했다. 논란은 ‘빈곤’이 아닌 ‘포르노’라는 글자에 쏠렸다. 정확한 의미를 짚기 이전에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라는 표현에만 함몰돼 선정적 해석과 비난이 난무했다. 1980년대 미국과 영국 등에서 빈곤국 어린이 사진을 내세워 진행한 기부 캠페인이 많았다. 빈곤 포르노는 이를 비판하기 위한 용어로 처음 등장했다. 당시 관련 사진을 활용한 모금은 성공적이었으나 이야기를 담기보다 시선을 끌기 위한 소재로 쓰인 점이 문제였다. 동정심만 자극하며 차별적 고정관념과 편견을 공고히 한다는 이유다.
정리하자면 빈곤 포르노는 굶주린 이들의 아픔을 세세하게 전시하면서 포르노처럼 자극적으로 활용하며, 타인의 고통을 도구처럼 이용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이다. 지금은 언론을 포함한 매체와 학계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상식에 가까운 용어인 셈. 언제 어디서나 사건·사고를 목격하고 누구나 퍼뜨릴 수 있는 시대다. 일상은 물론 사회를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기
‘타인의 고통’이라는 표현은 하나의 굳어진 인용구처럼 쓰인다. 그 시작은 2003년 출간된 수전 손택(Suan Sontag)의 저서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이다. 수전 손택은 1933년 태어나 2004년 사망한 미국의 문화예술평론가, 작가, 사상가, 활동가다. 당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평론가로 손꼽히는 그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이 책을 펴낸다. 참상을 담은 전쟁 사진을 중심으로 보도 사진, 포토 저널리즘에 대해 말하며 언론이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방법과 그를 해석하는 대중의 태도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도서 출간 직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20년 전 도서지만 이미지와 영상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에도 그의 해석은 유효하다.
2023년, 우리는 이미지로 말한다. 사진은 물론 영상까지 파도처럼 밀려드는 시대다. 카메라를 통해 전달하는 모든 장면은 촬영자 관점을 드러낸다. 카메라를 든 순간부터 의도를 담는다고 볼 수 있다. 구도를 잡는 것 자체가 무엇을 보여줄지 선택하는 과정이기 때문. 어떤 걸 강조할지, 무엇을 배제할지, 조명은 어떻게 쓸지, 초점은 어디에 맞출지. 프레임에 담기는 모든 게 선택된 시선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전 손택은 사진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또한 사진을 통해 마주하는 타인의 고통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며 그저 지켜보는 것에서 끝나기도 한다고. 다시 한번 빈곤 포르노를 생각해보자. 그런 사진의 목적은 대부분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누군가의 고통을 보며 내가 무사함에 안심한다. 빈곤과 고통을 겪는 사람이 나와 다르고, 내가 더 낫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동정심을 갖는 것만으로 의무를 다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며, 나와 상관없는 고통이라는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 속 비판은 하나의 결론으로 향한다. 동정 이상으로 나아가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자. 그렇다면 우린 무얼 해야 할까. 우선 자신을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이걸 보고 있어도 되는가?’ 계속해서 자문해야 한다.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흡수하는 게 아니라 자의식과 판단력을 갖고 걸러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SNS로 변화한 이미지 생산과 확산
스마트폰 발달로 대부분 사람이 24시간 카메라와 함께한다. 누구나 의도를 담은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대중이 이미지를 생산하고 확산할 때 기성 매체에서 ‘보도하기로 선택하는’ 일종의 검열보다 더 근본적 문제가 발생한다. 보도 윤리에 따른 최소한의 필터링마저 기능하지 않는 것. 우리 삶 전반을 뒤흔들고 있는 SNS는 타인의 고통을 수용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어떤 고통과 자극을 마주하든 무감해지기 쉽다. 점점 더 빨리 퍼지고, 자극의 역치도 자꾸만 높아진다. 자극적 이미지 확산은 어쩌면 관음증에 가까운 욕망이 더해진 것일 수도 있다.
지난 10.29 참사 당시 사고 현장과 피해자 모습이 SNS에서 실시간으로 퍼져나갔다. 사고 심각성보다 눈에 보이는 자극성에만 주목한 탓에 ‘그냥 장난치는 거 아니냐’라는 반응도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자극적인 사진과 영상에 매몰돼 숨 쉬듯 함께 살아왔는지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현장이 무방비하게 노출된 사진은 그곳에 없던 사람에게마저 트라우마를 안겼다.
하지만 긍정적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2010년 아랍의 봄,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란 시위 등 이슈가 세계적 이목을 끈 건 SNS 공이 컸다. 빈곤 포르노와 유사한 목적으로 활용된 이미지도 있었지만 대부분 연대를 호소하고자 공유됐다. 이처럼 대중과 선진국 중심 언론의 시선을 끌기엔 SNS가 가장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이다. 플랫폼 활용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앞서 언급한 사건에 세계가 반응한 이유는 ‘공감’에 있다.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에서 누군가 고통받고 있다면 공동 책임일 가능성이 크다. 모든 게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그 어떤 고통도 타자화할 수 없으며 나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겪었던 민주화운동, 우리가 겪었던 전쟁, 우리가 겪는 인권 탄압이며 고통이다. 하지만 일부는 동정은커녕 외면하고, 심지어 웃음거리로 소비하기도 한다. 이미지에 둘러싸인 시대인 만큼 그 안의 시선과 고통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타인의 존재를 나와 동등한 가치로 인식하는 게 먼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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