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미안해?
죄책감 덜어줄 종이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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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너도나도 종이를 쓰다 보면 이런 걱정이 들기도 한다. ‘종이를 너무 많이 낭비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지금부터 종이가 재활용되는 과정을 보고 나면 그런 걱정이 줄어들 거다. 우리는 종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보자.
폐지의 새로운 이름, 종이자원
종이는 지난 2,000여 년 동안 인간 생활과 밀접하게 얽혀왔다. 기록과 정보 전달 매개로 출발했지만 티슈·냅킨 같은 생활용품으로, 상품 포장·택배 상자 등 산업 포장재, 다른 산업과 융복합해 복사 용지, 감열지 등 다양한 특수용지로 발전했다. 친환경이 화두인 오늘날에는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대체재와 기초소재까지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종이는 본연의 기능을 다하면 자연 분해하거나 재활용 과정을 거쳐 다시 원료로 돌아간다. 산림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종이 생산 국가 7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재활용 덕분이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 종이 재활용률은 86%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이처럼 재탄생한 종이원료를 우리는 ‘폐지’라고 부른다. ‘버려지는 종이’라는 의미 때문에 영락없이 폐기물이라는 착각을 하곤 한다. 폐지는 1985년 일본에서 들어온 ‘고지’라는 말을 대체할 목적으로 사용했다. 재활용 필요성과 기준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부족했기에 자연히 종이는 단순 쓰레기로 여겨졌다. 그러다 2018년 <자원순환기본법> 9조를 제정했다. 환경적으로 유해하지 않고 유상으로 거래할 만한 폐기물을 순환자원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폐지를 자원으로 보는 관점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제지연합회는 폐지라는 용어가 시대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해 재개정을 추진해 왔다.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인상을 지우고 친환경성을 부각할 새로운 말이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지난 2022년 6월 16일에 제6회 종이의 날을 기념해 ‘폐지 대체용어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를 통해 폐지 대신 ‘종이자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정했다. 폐지의 용어적 한계를 극복할 뿐 아니라 한 번 이상 사용한 종이도 재활용 가능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국민이 쉽게 이해할 새 용어를 모색한 결과다.
자연과 가장 가까운 소재
종이는 그 무엇보다 환경친화적 소재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나무는 여러 번 재생이 가능하며, 실제 종이를 생산하는 데 쓰는 나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무가 아니다. 종이생산을 위해 별도로 조성된 인공 조림지에서 조달하고, 가공 후 펌프 형태로 이용한다. 쉽게 말해 제지 회사와 펄프 회사가 운영하는 ‘나무 농장’이다. 쌀을 얻기 위해 벼농사를 짓는 것처럼, 종이를 위한 원료를 얻기 위해 나무를 키우는 것. 인공 조림지에서 종이 생산을 위해 나무를 베어낸 공간에 다시 새로운 나무를 심어 재조림하는 ‘순환 경작’ 공정을 거친다.
게다가 종이생산을 위해 인공 조성한 산림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지구 온난화 현상을 방지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어린 묘목이 성장하면서 베어낸 나무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다량의 산소까지 생산한다고. 제지회사 관계자는 ‘만약 종이 생산을 멈춰서 별도의 조림지를 운영하지 않는다면 그 땅은 도시 개발이나 농작물 재배로 사용되어 산림으로서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세상을 구하는 종이자원
건축 업계는 종이를 새로운 건축 소재로 주목한다.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으로 난민 200만 명이 발생했을 당시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坂茂)는 종이로 임시 거처를 만들었다. 1995년에는 고베 대지진 이재민을 위해 맥주 상자, 종이 튜브로 기초와 벽을 쌓고 지붕은 텐트로 구성한 종이 집을 만들었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도 카드보드 대성당(Cardboard Cathedral)이라고 불리는 종이 성당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에도 중국 쓰촨성 대지진, 인도 구자라트 지진, 아이티 지진 등 이재민을 위한 이동식 종이 주택을 꾸준히 만드는 중이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파리, 베를린 등 여러 도시에 종이 칸막이로 구성한 임시 거처를 지었다.
이런 시도에 힘입어 가구 업체도 종이가구를 선보였다. 최초로 제작한 사람은 세계적 건축가이자 캐나다 디자이너인 프랭크 게리(Frank Gehry)다. 1972년 그가 제작한 ‘이지에지(Easy Edge)’ 의자는 골판지를 여러 겹 붙여 견고하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종이도 가구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영감을 줬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 가구 생산기업인 이케아(IKEA)까지 종이가구 시장에 뛰어들면서 시장 규모를 넓히고 있는 중이다. 국내에서는 2018년 소셜벤처기업 페이퍼팝이 최초로 종이 가구회사를 설립했다. 노트북 거치대, 칸막이, 책장 등 모든 제품을 종이로 만들었다고.
종이가 가진 약한 이미지 때문에 종이로 만든 가구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 자동차엔진 블록, 중화물 포장에 쓰는 고배합 골판지를 겹겹이 쌓아 만들기 때문에 웬만한 목재 가구만큼 튼튼함을 자랑한다.
모두의 동참이 필요한 자원 재활용
종이가 진정한 친환경 소재로 불리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바로 코팅 종이 사용을 줄이는 것이다. 종이 빨대나 종이컵, 전단을 만들 때 사용하는 코팅 종이는 방수나 컬러 인쇄를 목적으로 플라스틱 코팅을 한다. 종이를 재활용하려면 물에 넣었을 때 흐물흐물한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코팅 종이는 물에 녹지 않아 재활용이 어렵다. 이를 포함해 종이테이프, 벽지 등은 전부 일반쓰레기로 분류해 소각한다.
제지업계는 ‘스톤 페이퍼’를 개발하는 등 종이 친환경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스톤 페이퍼는 채석장이나 광산에서 버려진 돌을 가루 내서 만든 종이다. 벌목이 필요 없고 종이를 하얗게 만드는 표백제가 쓰이지 않아 제조 공정이 짧다는 장점을 가진다. 탄소 발생량이 적고 자연 분해가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이다.
앞으로 종이의 쓸모는 더욱 다양해질 전망이다. 소재만 바꾼다고 해서 환경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소재를 바꿈으로써 환경에 주는 영향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는 있다. 나와 지구 모두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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